아름다움의 좌표를 다시 그리다
좋은 그림은 대상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박수근화백 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로 “인간의 존엄”을 그렸습니다.
한 사람은 공기 속에서 빛을 반사시키며 환희를 빚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친 표면 위에 체온을 눌러 새기듯 일상의 품위를 조각했습니다.
두 화가의 회화적 언어는 다르지만, 그들이 향한 곳은 늘 사람이었습니다.

1. 르누아르 — 광학의 화가, 촉광(觸光)의 회화
르누아르는 색을 단지 칠하지 않습니다. 그는 빛을 “만지듯” 다룹니다.
야외에서의 즉흥성과 분절된 붓질, 따뜻한 살색의 반사광은 인물과 배경을 분리하기보다 서로를 스며들게 합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햇살은 점(點)으로 쪼개져 나뭇잎 사이를 통과하고, 그 점들은 인물의 볼과 어깨, 탁자 위 유리잔에 부딪혀 흔들리는 생기를 낳습니다. 이때 화면은 “본 것”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보는 행위”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말년의 르누아르는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굳어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붓을 손에 묶고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회화에 대한 사랑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선 순간, 그의 색채는 더욱 부드럽고 원숙해졌고, 살결의 온기는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감응이었습니다.
2. 박수근화백 — 물성의 화가, 촉각의 윤리
박수근화백 화면은 먼저 “만져진다”는 감각을 불러옵니다.
두터운 마티에르, 회갈색의 저채도, 거칠게 갈린 듯한 표면은 시선을 천천히 걷게 만듭니다.
빨래터의 아낙, 장터의 어머니와 아이, 나무 아래 쉼을 얻는 노인들—그는 한국적 삶의 질감을 회화의 물성으로 치환합니다.
화면은 단조롭지 않습니다.
얇게 솟은 윤곽과 평평한 면들의 배치, 절제된 음영은 작은 움직임과 고요한 리듬을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어린 시절 물감 대신 석회와 분을 반죽해 그림을 그렸던 경험은 훗날 그의 표면 언어가 됩니다.
전쟁 직후 생계를 위해 PX에서 엽서를 팔던 시기에도 그는 빈 여백에 사람의 체온을 남기듯, 꾸준히 화면을 쌓아 올렸습니다. 박수근에게 회화란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곁의 삶을 향한 예의였습니다.
3. 미학적 접점 — 빛과 질감, 시간이 머무는 자리
시간성:
르누아르는 한낮의 번짐, 순간의 환희를 붙잡습니다.
박수근은 반복되는 노동과 기다림의 시간, 생활의 느린 호흡을 새깁니다.
하나는 찰나의 광학,
다른 하나는 침전된 촉각
—그러나 둘 다 시간을 존재의 온도로 번역합니다.
시선의 윤리:
르누아르는 말합니다. “추한 사람은 없다.”
박수근도 응답합니다. “소박한 것에서 품위를 본다.”
두 화가의 시선은 대상 위에 군림하지 않고, 대상 곁에 서서 함께 숨십니다.
형식과 내용의 일치:
르누아르의 분절된 붓질은 소셜 한 장면의 다성(多聲)을,
박수근의 단단한 표면은 공동체의 끈기와 연대를 시각화합니다.
형식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메시지의 몸입니다.
4. 르느아르와 박수근 화백
핵심 미학 | 광학의 회화: 분절된 붓질, 반사광, 공기의 리듬 | 물성의 회화: 두터운 마티에르, 저채도, 표면의 리듬 |
시간의 처리 | 찰나의 환희, 한낮의 떨림 | 침전된 일상, 느린 호흡 |
주요 주제 | 도시의 여가, 관계의 생기 | 서민의 노동, 가족의 품위 |
형식-내용 합치 | 다성적 장면 ↔ 분할된 색과 빛 | 연대의 서사 ↔ 응집된 표면과 형태 |
대표 일화 | 말년, 붓을 손에 묶고 계속 그린 집념 | 석회·분으로 시작한 화법, 생계 속에서도 지속 |
한 문장 요약 | 빛으로 인간의 환희를 빚다 | 돌 같은 표면에 인간의 온기를 새기다 |
4. 작품 한 컷 상상
르누와르 : 왼편에는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점무늬의 빛, 잔에 부딪힌 웃음소리, 원형으로 퍼지는 춤의 궤적
박수근화백 : 오른편에는 회갈색 바탕 위로 눌러 올린 어깨선, 물동이의 무게, 서로를 받쳐 주는 손의 구조
한쪽은 공기의 떨림으로,
다른 쪽은 표면의 압력으로 인간의 온기를 전합니다.
서로 다른 악기지만, 같은 조성(人間)을 연주합니다.
'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바이 스트라우스와 코코 샤넬 ― 옷을 넘어 삶을 바꾸다 (59) | 2025.09.23 |
---|---|
조르제토 주지아로 & 피터 슈라이어- 직선과 원, 두 거장의 자동차 디자인 (54) | 2025.09.21 |
노스트라다무스와 남사고: 시대를 달군 두 예언가 이야기 (45) | 2025.09.20 |
이찬진과 빌 게이츠: 청춘의 코드로 미래를 쓰다 (60) | 2025.09.19 |
이세돌과 마그누스 칼슨 - 승부의 본질 & 철학 (69)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