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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

오스카 쉰들러와 유진 크네즈 - 두 이방인의 선택

by I watch Trends. 2025.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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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생명을 지킨 기업가,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문화를 지킨 학자.

서로 다른 대륙과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가장 힘든 순간에, 무엇을 지킬 것인가?”

역사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 선택으로 사람을 기억한다.

 

오스카 쉰들러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죽음의 명단을 생명의 명단으로 바꾸었고,

유진 크네즈는 해방과 전쟁의 한국에서 사라질 뻔한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한 사람은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은 문화를 구했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놀라운 평행선을 이룬다.

 

 

오스카 쉰들러 / 유진 크네즈

1. 오스카 쉰들러 — 죽음의 명단을 생명의 명단으로

1) 배경

오스카 쉰들러(1908~1974)는 독일‧체코 국경 인근에서 태어난 사업가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당에 입당했고, 점령지 폴란드 크라쿠프에 에나멜 공장을 세워 전쟁 특수를 노렸다.

초기 동기는 분명히 이익이었다.

 

2) 전환점

플라슈프 강제수용소의 학살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계산은 바뀌었다.

지휘관 아몬 괴트의 무차별 사살 장면은 그에게 “돈보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기준을 새겼다.

그는 회계사 이첵 슈턴과 상의해 공장 노동자 명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3) 핵심 행동

  • 유대인 약 1,200명을 공장 직원으로 등록(훗날 ‘쉰들러 리스트’).
  • 독일군 장교들을 뇌물‧접대로 설득해 강제이송을 지연·취소.
  • 전쟁 말기에는 의도적으로 불량 포탄을 생산시켜 처벌을 피하며 시간을 벌게 함.
  • 식량‧의약품을 마련하려 사재를 전액 투입.

4) 위험과 대가

체제와의 충돌 위험을 감수했고, 결국 전 재산을 탕진했다.

종전 뒤에는 사업 실패로 궁핍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선택을 되돌리지 않았다.

명단의 사람들은 종전을 살아 맞았다.

그 생존자와 수천 명의 후손은 오늘도 ‘쉰들러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한 개인의 결단이 만들어낸 집단적 생존을 증언한다.

 

2. 유진 크네즈 — 전쟁 속 문화재의 수호자

1) 배경

유진 크네즈(1916~2010)는 미국 인디애나 출신 인류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정 교육‧문화 담당관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해방 직후 한국의 문화재는 훼손·도난·방치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2) 전환점

현장을 확인한 그는 “이 유산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행정가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 중심으로 움직였다.

3) 핵심 행동

  • 원각사지 십층석탑 복원 참여: 전통기법과 현대 보존기술의 연결.
  • 경주 호우총 발굴 지원: 미군정·사령부를 설득해 자금과 장비 확보.
  •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국립박물관·덕수궁 소장 국보급 유물 이운(피란)에 핵심 역할:
    • 트럭·병참선 확보,
    • 군 검문소 설득,
    • 유물 상자 직접 동행으로 안전 보장.

4) 위험과 대가

전시 상황에서 물류·치안 리스크가 컸고, 개인 신변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의 경력과 시간의 상당 부분이 한국 문화재 보존에 투입되었다.

고려청자, 금동불상, 조선왕조실록 일부 등 핵심 유물이 전쟁의 화마를 피했다.

이는 한국 고고학·보존학의 연속성을 보장했고,

이후 연구·전시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3.  한눈에 보기

구분 오스카 쉰들러 유진 크네즈
역할 공장 운영자(사업가) 인류학자·미군정 문화 담당
전환점 학살 직접 목격 문화재 훼손·전쟁 위기 확인
핵심 행동 ‘리스트’로 1,200명 보호, 뇌물·불량 포탄 전략 석탑 복원, 호우총 발굴, 유물 이운 작전
대가 전 재산 탕진, 전후 빈곤 전시 리스크 감수, 경력의 장기 헌신
영향 생존자·후손 공동체 형성 보존 연속성·연구·전시 기반 확보
평가 ‘의로운 이방인’, 시온산 안장, 영화로 재조명 은관문화훈장, ‘문화재의 쉰들러’

4. 후대의 평가 

그는 예루살렘 시온산에 안장되었다(비유대인으론 이례적). 이스라엘은 그를 ‘의로운 이방인’으로 추서했다.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그의 결정을 세계적 기억으로 확장했다.

 

전후에도 한복·민속·음악을 연구해 한국학 확산에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은관 문화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문화재의 쉰들러”로 현장과 학계에서 오랫동안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