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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

장기려박사와 로널드 피셔 – 데이터를 통해 생명을 지킨 두 사람

by I watch Trends. 2025.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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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환자를 살린 의사와, 실험을 과학으로 만든 통계학자. 서로 만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신념을 공유했다. 정확한 데이터가 생명을 구한다는 믿음이다.

장기려박사님 / 로널드 피셔

 

1. 의사가 된 데이터 분석가

1950년대 초,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부산 영도. 피난민 천막촌 사이로 허름한 병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병원의 문을 열면, 흰 가운 대신 낡은 셔츠를 입은 의사가 환자를 맞았다. 그는 바로 장기려 박사였다.

가난 때문에 치료를 미루는 환자들이 줄을 섰지만, 장기려는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 진료실 구석에는 작은 동전함이 놓여 있었고,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마음 닿는 만큼만 넣으세요.”

이 작은 통은 훗날 지역 기반 상호부조 모델인 청십자 의료보험으로 발전하며, 의료의 문턱을 낮추는 씨앗이 된다.

 

장기려는 환자의 병력, 수술 날짜, 회복 과정, 생활습관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의학을 경험과 직관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의 노트에는 질문이 빼곡했다.

“왜 어떤 환자는 수술 후 빨리 회복하는데, 어떤 환자는 그렇지 못할까?”

답을 찾기 위해 그는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모으고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회복이 더딘 환자의 공통 요인을 찾아내 수술 전 준비와 회복 프로그램을 개선했고, 합병증 위험도 낮출 수 있었다.

기록과 분석은 장기려에게 또 하나의 치료 도구였다.

2. 케임브리지의 통계 혁명가

한편, 같은 시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실에서는 로널드 A. 피셔가 농업 실험 데이터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식물에 비료를 주는 단순한 실험에서조차, 평균만 비교해서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분산분석(ANOVA)최대우도법(MLE) 같은 현대 통계학의 핵심 도구들이다.

피셔의 공헌은 계산법을 넘어선다.

그는 실험 설계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비교해야 인과를 말할 수 있는지를 과학의 언어로 정리했다.

 

피셔가 남긴 3가지 표준

  • 무작위화(Randomization)로 편향을 줄인다
  • 반복(Replication)으로 변동을 추정한다
  • 블록화(Blocking)로 교란요인을 통제한다

3. 의학과 통계의 만남

피셔의 방법론은 의학에 즉시 응용됐다. 신약의 효과를 검증하고 부작용을 확인하는 임상시험에서, 무작위 대조군가설검정은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의 수학이 병원의 안전망이 된 셈이다.

현장에 있던 장기려 역시 같은 철학을 실천했다. 청십자 의료보험이 적용된 마을에서 그는 환자 병력, 생활습관, 의료비 지출을 분석해 결핵 예방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지역 여건을 반영한 교육과 방문진료, 영양 지원이 결합되었고, 이후 해당 지역의 결핵 발생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연구실과 병원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데이터는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 역사적 논쟁을 포함해 피셔의 일부 견해(예: 흡연-폐암 인과에 대한 회의적 입장)는 오늘날과 관점이 달랐지만, 그 과정 또한 역학·임상 연구 설계를 더 엄격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다른 길, 같은 믿음

  • 정확한 데이터가 사람을 살린다.
  • 근거 없는 치료와 실험은 위험하다.

장기려는 환자 개별 데이터를 통해 치료와 예방의 정확도를 높였고,

피셔는 실험 설계와 통계 분석으로 세계의 연구 수준을 끌어올렸다.

한 사람은 현장에서, 다른 한 사람은 이론에서 길을 냈지만 두 길은 한 점에서 만났다.

5. 남긴 발자취

장기려박사님은 평생 무소유로 살며 가난한 이들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의 청십자 모델은 한국의 보편적 건강보장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피셔는 “현대 통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오늘날 의학·생물학·사회과학 전반에서 그의 방법론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데이터로 생명을 지키는 길이었다.

6. 장기려박사님 vs 로널드 피셔 

구분 장기려박사님 로널드 A. 피셔
출생/시대 1911–1995, 평안북도 의주 1890–1962, 영국 런던
전공/분야 의학(외과·공중보건) 통계학·유전학·실험설계
대표 업적 청십자 의료보험 설계·운영, 무상의료 실천, 예방의학 확산 분산분석(ANOVA), 최대우도법(MLE),
실험설계 표준화
활동 환경 전후 복구기, 의료 인프라 부족,
취약계층 다수
과학 실험의 확산기,
농업·생물학 데이터 분석 수요
핵심 방법 환자 기록의 체계화, 지역 맞춤형 예방 프로그램 무작위화·반복·블록화 기반의 실험 설계
영향 보편적 건강보장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토대 마련 임상·역학·사회과학 전반의 분석 표준 제공
공통점 데이터를 인류 건강 증진에 사용하는 과학적 태도

7. 마무리하며 

장기려와 로널드 피셔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과 인술은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데이터와 철저한 기록이라는 공통 기반 위에서 만나 인류의 건강을 지켜냈다.

오늘 우리는 의료기록 전산화,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진단 같은 첨단 도구를 가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술의 뿌리에는, 장기려의 노트와 피셔의 실험 설계처럼 사람을 위한 데이터라는 철학이 있다.

두 사람이 보여준 길은, 우리가 과학과 인문, 기술과 윤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사용할지를 여전히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