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라.”
프랑스 혁명기의 민심은 이렇게 분노로 터져나왔다.
그 분노의 대상은 단 하나였다.
–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조선에도 민심이 들끓던 시절이 있었다.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에서 불교 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를 주도한 여인이 있었다.
조선 중기의 실세였다
그녀의 이름은 문정왕후, .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았지만
모두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섰다는 이유로,
그리고 사치와 정치개입으로 비난받았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다.

1. 왕후이자 권력자, 사랑받지 못한 이유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화려한 옷과 보석,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호화로운 생활.
그녀는 프랑스 민중의 눈에 '무책임한 사치의 화신'으로 보였다.
케이크' 발언의 진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은 실제로 그녀가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문장을 그녀의 입에 넣었고,
그 이미지로 인해 앙투아네트는 결국 단두대에 오른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아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불교 세력을 등용하고, 정치를 주도했다.
보우 스님을 판결 자리로’
문정왕후는 유생들이 반대하던 보우 스님을 조정 요직에 앉히고,숭유억불의 조선에서 불교를 공공연히 부활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탄핵과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2.사치인가? 전략인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는 외교적인 중재자 역할도 했으며,왕실 예산 중 일부만 사용했지만,
베르사유 궁의 화려함과 그녀의 스타일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었다.
문정왕후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외척 세력에 왕권이 휘둘렸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녀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 전략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둘 다 민심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백성들은 ‘여성이 앞장선 권력’을 언제나 ‘비정상’으로 받아들였다.
3. 비극적 결말, 그리고 재조명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의 광풍 속에서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38세.
그녀는 처형 직전에도 "저를 용서하세요, 실수로 당신의 발을 밟았군요."라고 말할 정도로 침착했다.
문정왕후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왕실 권력을 유지했지만,
그녀가 죽자 외척 세력은 몰락했고, 조선 조정은 다시 성리학 중심으로 돌아갔다.
불교는 다시 억압받았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 둘은 재조명된다.
– 마리는 ‘귀족 문화의 희생자’로,
– 문정은 ‘조선 최초의 여성 정치가’로.
4.마리 앙투아네트 & 문정왕후
항목 |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 문정왕후 (1501–1565) |
국적 | 프랑스 | 조선 |
지위 | 프랑스 왕비 | 조선 국모, 섭정 |
정치 참여 | 제한적이지만 비난 받음 | 섭정으로 실질 권력 행사 |
주요 비판 | 사치, 무능, 민심 단절 | 외척 정치, 불교 부흥, 과도한 개입 |
실화 사례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루머 | 보우 스님 등용, 불교 정책 |
결말 |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 처형 | 평생 권력 유지 후 사망 |
후대 평가 | 이미지 희생자, 비극적 여왕 | 여성 정치가, 논쟁적 평가 존재 |
두 사람은 사치와 정치개입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을 단순히 비난만 할 수 없다.
그들은 시대의 금기를 넘어선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