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언제나 인간에게 두 얼굴을 보였다. 풍요로운 물산과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거센 파도와 생사를 건 모험으로 시험했다. 동서양의 먼 시대, 먼 바다에서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바다를 정복한 두 인물이 있었다. 통일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와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개척자 바스코 다 가마다.

바스코 다 가마 / 장보고
1. 장보고 – 황해를 지배한 해상왕
828년, 통일신라 문성왕 때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장보고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해상 요새를 건설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무역이 아니었다.
당시 동중국해와 황해 일대는 해적이 창궐해 상인과 어민들이 생명을 걸고 항해해야 했다.
장보고는 이를 뿌리 뽑기 위해 무장 선단을 조직하고, 해적을 소탕하며 동아시아 최대의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는 신라, 일본, 당나라를 잇는 무역로를 장악했고 비단과 향료, 도자기, 금, 인삼이 오갔다. 또한 일본에서 신라로 넘어오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힘쓰며 ‘해상 호민관’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결국 신라 귀족층의 경계심을 불렀고, 853년 정치적 음모 속에 암살당하며 그의 해상왕국은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장보고의 이름은 동아시아 해양사에 길이 남았다.
2. 바스코 다 가마 – 유럽에서 인도로 향한 길
15세기 말, 유럽은 향신료를 찾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육로는 오스만 제국에 막혀 있었고, 대서양을 통한 해상로 개척이 절실했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젊고 담대한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에게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을 명령했다.
1497년, 그는 리스본을 출발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오늘의 코즈코데)에 도착했다.
이는 유럽–인도 직항로 개척이라는 인류사적 쾌거였다.
다 가마의 항해는 대항해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고,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며 세계 해양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동시에 그 항해는 식민지 지배와 무력 충돌의 서막이기도 했다.
3. 닮은 점과 다른 길
장보고와 바스코 다 가마는 모두 바다를 통해 세상을 바꾼 인물이었다.
둘 다 막힌 길을 열었고,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교류와 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장보고는 ‘해양 질서와 상생’을 지향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패권과 독점’의 시대를 열었다.
동양의 바다는 공동 번영의 장이었고,
서양의 바다는 치열한 식민 경쟁의 무대였다.
4. 장보고 vs 바스코 다 가마
출생 | 787년경, 통일신라 | 1460년경, 포르투갈 |
활동 시기 | 9세기 | 15~16세기 |
주요 업적 | 청해진 설치, 해적 소탕, 동아시아 무역로 장악 | 유럽–인도 항로 개척, 대항해시대 개막 |
목표 | 해상 질서 확립, 상생 무역 | 향신료 무역 독점, 해양 패권 확보 |
영향 | 동아시아 교역 발전, 인신매매 근절에 기여 | 유럽의 세계 진출 가속, 식민지 확장 |
최후 | 853년, 정치적 암살 | 인도 총독 재임 중 병사 |
5. 바다가 남긴 유산
장보고와 바스코 다 가마는 서로 다른 바다,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모두 바다를 통해 역사를 바꾼 개척자였다.
장보고의 바다는 사람과 문화를 잇는 다리였고,
바스코 다 가마의 바다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길이었다.
오늘날에도 바다는 여전히 기회의 땅이자 경계 없는 만남의 장소다.
다만 우리는 장보고처럼 상생과 보호의 바다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다 가마처럼 독점과 충돌의 바다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바다는, 결국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