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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

허난설헌과 한강, 한강 너머에서 만난 두 여인

by I watch Trends. 202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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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누군가의 시를 읽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젖는다.
그건 단지 단어가 슬퍼서가 아니라, 단어 사이에 숨어 있는 삶의 결이 깊어서다.
그런 시를 쓰는 두 여인이 있다.
 
하나는 조선 중기, 이름도 지우고 싶었던 시대의 여인, 허난설헌.
또 하나는 현대 서울에서 소설과 시를 넘나들며 고요한 파장을 일으키는 작가, 한강
 
이 두 여성은 서로 400년의 시간을 두고 있지만,
'한강처럼 흐르는 고통과 아름다움'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맞닿아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 / 한강작가 / 허난설헌 / 규원가

 

1. 허난설헌 – 꽃 피우지 못한 재능의 안타까움

조선 중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허난설헌(1563~1589)은 일찍이 뛰어난 문재(文才)를 드러냅니다.
불과 8살에 한문 시를 짓고, 오빠 허균(『홍길동전』의 저자)과 함께 집안에서도 천재로 인정받았죠.
 
하지만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냉담한 시댁, 어린 자녀들의 죽음,
그리고 27세라는 짧은 생은 그녀의 시에 짙은 허무와 고독, 초월의 아름다움을 남깁니다.
(너무 이른나이에  삶을 마감하셨는데.. 제 마음속에 많은 생각과 느낌이 울립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규원가(閨怨歌)」는 ‘한 여성의 외로움과 억눌린 자아’를 절절히 담아낸 명작입니다.
남편의 무관심과 자신을 갇힌 존재로 느끼는 서러움은, 당시 여성의 삶 자체가 얼마나 감정의 감옥이었는지를 보여주죠.
 
千古傷心事, 不語對春風 "천고의 상심을, 말 못하고 봄바람만 마주하네"
 
 

2. 한강 – 현대의 고통을 껴안는 서사

현대로 건너오면, 작가 한강(1970~)의 문학은 '말 없는 고통'을 다루는 데 있어 허난설헌과 놀라운 공명(共鳴)을 보입니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그녀는 인간 내면의 분열, 억압, 그리고 그로 인한 침묵의 폭력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면서 점점 인간이라는 틀마저 거부하고 식물이 되어가죠.
이는 단순한 식단의 변화가 아니라, 폭력적 가부장제에서 탈출하려는 ‘자기 소멸적 저항’입니다.
 
허난설헌의 여성 주체가 ‘말 못 하고 견디는’ 존재였다면,
한강의 여성은 ‘몸으로 말하고 결국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3. 400년의 시간, 여성 문학의 흐름

허난설헌이 살던 시대는 여성의 이름조차 역사에서 지워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녀의 시가 중국에서 먼저 출판되고, 조선에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은 사실은 우리 문학사에서도 부끄러운 대목입니다.
반면 한강은 국제 문단에서 조명받고, 여성 작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고통을 침묵 속에서 아름답게 직조해낸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둘 다 언어를 무기로 삼지 않고, 언어를 '고통의 유리창'처럼 비춥니다.
직접적인 외침이 아니라, 정제된 감정, 서늘한 이미지, 그리고 절제된 분노로 문학을 구성하죠.


4. 한강(漢江), 그리고 두 여성의 이름

흥미롭게도 ‘한강’이라는 지명은
허난설헌과도, 작가 한강과도 상징적으로 연결됩니다.
 
허난설헌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수도 한양(서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그녀의 시가 퍼졌습니다.
한강 작가 역시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한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문학 강을 건넜습니다.
 
지금 한강변을 거닐며 이 두 여인의 시를 떠올린다면, 문득 이렇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한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여성의 말 못할 고통과,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실어 나르는 물결이다."

5. 허난설헌과 한강 

활동 시기조선 중기 (16세기)현대 (1990년대~현재)
대표 작품「규원가」, 「몽유도원도」『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주요 주제억압, 고독, 여성의 한폭력, 침묵, 존재의 해체
문학적 특징한시, 은유적 표현, 고전미서늘한 문체, 상징과 파편적 서사
공통점여성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문학적 언어

6. 마무리하며 

허난설헌은 꽃이 피기 전 스러진 천재였고,
한강은 꽃이 지는 순간까지도 고통을 껴안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둘 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을 끈질기게 응시하며, 우리에게 묻고 있죠.
“당신의 고통은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