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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본다

박경리의 『토지』와 펄 벅의 『대지』, 땅을 말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

by I watch Trends. 2025.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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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경상남도 통영의 한 골목길.
손에 연필을 든 여인이 조용히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도 하동 평사리의 들판을 그릴 수 있었다.  그 들판에는 이름 모를 백성들이 숨 쉬고, 눈물 흘리고, 사랑하고, 또 죽어갔다.

그 여인은 박경리였다.
 
시간은 조금 더 거슬러 1920년대 중국 장쑤성의 농촌.
미국인 선교사의 딸이었던 펄 벅은 황토빛 흙길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자랐다.
그녀는 동네 할머니들이 짓는 노래에서, 봄에 심는 씨앗에서, 장터에서 오가는 말들에서 중국 농민의 삶을 배웠다.

펄 벅에게는 중국이 어쩌면 본래의 고향 같았다.
 
두 여성은 각기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지만, 모두 ‘땅’에서 이야기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토지’를 이야기한 방식은, 단순한 배경 묘사 이상의 것이었다.
 
박경리에게 ‘토지’는 역사의 굴곡 속에 뿌리 내린 민족의 자화상을,
펄 벅에게 ‘대지’는 삶을 버티는 민중의 땀이었다.
 

토지 / 박경리 / 펄 벅 / 대지

 

1. 딸을 잃고, 민족을 품다 – 박경리의 땅

박경리가 『토지』를 쓰기 시작한 건 딸을 잃고 나서였다.
1960년대 초반, 교통사고로 어린 딸을 잃고 한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
절망과 무력감에 허우적거리던 그녀가 다시 삶을 붙잡은 방법은 오직 글쓰기였다.
“이 땅을 잊지 말자.”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하듯 원고지를 메웠다.
그녀가 택한 무대는 조선 말기 하동의 작은 마을 평사리.
최참판 가문의 몰락과 서희라는 여인의 자립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수십 년의 역사가 펼쳐졌다.
 
『토지』를 쓰는 동안 그녀는 매일 새벽 세 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세상이 아직 잠든 그 시간에 땅의 기억을 불러왔다.
놀라운 건, 그녀가 하동을 한 번도 제대로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마치 거기 살고 있는 사람처럼 생생했다.

2. 농민의 흙내음, 세계를 감동시키다 – 펄 벅의 이야기

펄 벅은 ‘중국의 땅에서 태어난 미국인’처럼 살아갔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중국의 농민들과 어울려 자라며, 전통적인 중국어보다 농촌 사투리를 더 잘했다.
어린 시절 그녀가 지켜본 건, 부유한 도시가 아닌 비 오는 날에도 논에 나가야 했던 사람들,아이를 팔아야만 겨울을 날 수 있던 부모들이었다.
『대지』는 그런 기억의 집합이었다. 왕룽이라는 이름의 농부가 주인공이다.
흙을 사랑하고, 흙을 떠나지 않으면 굶지 않을 거라는 신념으로 살아간다.하지만 시대는 그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부자가 되면서 인간성이 무너지고, 가족이 부서져간다.
펄 벅은 이 과정을 통해 ‘성공’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는지 묻는다.
1931년 출간된 『대지』는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2년 만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되면서 세계적인 문학으로 자리잡았다.

3. 땅이 말해주는 것

『토지』 – “이 땅 위에서 저마다의 몫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대지』 – “나는 땅을 믿는다.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
 
두 문장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 태어났지만, 하나의 믿음을 공유한다.
땅은 인간의 거울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신뢰의 대상이라는 것.
 
박경리는 글을 쓰면서 작은 화분을 곁에 두었고,
펄 벅은 책상 위에 마른 흙을 담은 그릇을 두었다.
 
그들의 문학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손끝으로 만진 흙의 기억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4. 비교로 보는 『토지』와 『대지』

작가 출신대한민국미국 (중국 체류)
시대 배경조선 말기~일제강점기청말~중화민국 초기
주 배경하동 평사리중국 농촌
중심 인물서희, 최참판가 인물들왕룽, 오란
주요 주제민족, 역사, 여성, 저항가족, 계급, 근대화, 인간성
문체 특징서정적, 복합적 구조간결하고 직선적인 전개
작가의 동기개인적 상실과 민족의 기억타문화 이해와 공감
영향력한국 문학의 정수, 드라마 재해석퓰리처상 수상, 세계적 베스트셀러
‘토지’의 의미민족과 역사의 뿌리생존과 삶의 근간

 
 

5. 시대를 넘는 공감

시대도, 언어도, 문화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땅을 통해 인간을 이해했고,
문학을 통해 역사를 기록했다.
 
『토지』는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일깨운 대하소설이 되었고,
『대지』는 세계 독자들에게 인간의 본능과 윤리의 충돌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다.
 
두 작품은 단순한 농민의 이야기 그 이상이다.
그것은 문학이 들려주는, ‘땅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