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약을 만든다는 말은 간단하다.
그 약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달하는가까지 책임지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숙제다.
한국의 기업가 유일한과 미국의 과학자-경영자 로이 바겔로스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무대에서 그 숙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었다.
1. 유일한박사 — 정직을 ‘규칙’으로 만든 사람
1926년, 일제강점기의 서울.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세우며 “좋은 약은 정직한 공정에서 나온다”는 기준을 회사의 첫 문장으로 삼았다. 당시 국내 제약은 수입 의존이 컸고, 품질 규격도 들쭉날쭉했다.
어느 해 원료 가격이 급등해 몇몇 제품의 수익이 급격히 나빠졌다. 임원이 성분을 낮춰 비용을 줄이자고 제안하자, 유일한은 고개를 저었다.
“가격은 언젠가 다시 맞출 수 있어도, 신뢰는 한 번 잃으면 못 산다.”
그는 포뮬러를 바꾸지 않는 대신 경영진 보너스를 줄였다. 단기 성적표는 초라했지만 약국과 의사들 사이에 “유한은 레시피를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는 신뢰가 쌓였다. 그 신뢰는 곧 브랜드가 된다.
영업 관행을 손보자는 논의가 나오자 그는 더 단단한 선택을 한다.
접대비 계정 자체를 없앤 것이다. “거절할 근거를 회계에 만들어 달라.” 말보다 구조를 바꾸는 쪽을 택했다.
그는 이익을 곧장 외형 확장에만 쓰지 않았다. 장학·복지를 제도화하고, 병가 규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퇴근 버스를 늘렸다.
말년에는 개인 재산과 회사 지분 상당을 사회에 돌려 공익 재단의 씨앗을 뿌렸다.
유일한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공장 건물이 아니었다.
정직을 회사의 규칙으로 만든 것. 그래서 사람이 바뀌어도 기준이 남는 거버넌스를 구축한 것이다.
2. 로이 바겔로스 — 약을 ‘도달’까지 책임진 사람
의사이자 생화학자였던 바겔로스는 연구소장을 거쳐 1985년 머크 CEO가 되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늘 두 개의 지도가 있었다. 하나는 파이프라인 차트, 다른 하나는 질병 분포 지도였다. 그는 신약의 과학적 완성도만큼 “이 약을 실제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1987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 실명까지 부르는 강변실명이 큰 문제였다. 머크가 개발한 이버멕틴(상품명 메크티잔)이 효과를 보였지만, 약값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높은 벽이었다. 바겔로스는 이사회에서 결단을 요청한다.
“우리가 만들 수 있고 효과가 있다면, 돈이 없어도 받아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한.”
재무적 우려를 뚫고 결정이 내려지자, 곧 시스템이 이어졌다.
WHO·세계은행·각국 보건부·현지 NGO와 손잡고 생산→운송→보관→투약→추적까지 이어지는 체인을 설계했다.
약만 보내고 끝내지 않기 위해 현지 의료진 교육과 대량 투약 캠페인 일정까지 함께 짰다.
시간이 흐르며 중남미 일부 국가는 질병 퇴치를 선언했고, 아프리카에서도 유병률과 합병증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바겔로스가 증명한 것은 한 문장이다. 혁신과 접근성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과학의 성과가 사람의 삶으로 번역되려면, 기업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연합이 뒤를 받쳐야 한다.
3. 같은 질문, 다른 도구
유일한은 가치를 회사 안으로 깊이 심었다. 포뮬러·품질·복지·장학을 규칙으로 묶자, 신뢰가 자산이 됐다.
바겔로스는 가치를 회사 밖으로 길게 뻗었다. 국제기구·정부·NGO와 공급망을 나눠 맡고 교육과 모니터링까지 연결하자,
접근성이 결과가 됐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지만, 둘 다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약은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4. 비교표 — 유일한 × 로이 바겔로스
구분 |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 로이 바겔로스 (Merck) |
핵심 질문 | “좋은 약의 신뢰를 어떻게 지킬까?” | “좋은 약이 누구에게 닿게 할까?” |
결정적 장면 | 원가 급등에도 포뮬러 미변경·경영진 보너스 삭감 | 메크티잔 무상공급 제안·이사회 설득 |
실행 도구 | 규정·프로세스·회계로 정직의 제도화 | WHO·정부·NGO와 글로벌 파트너십 |
시스템 초점 | 회사 내부 거버넌스(품질·복지·장학 구조화) | 회사 외부 공급망(생산→운송→투약→추적) |
지표/결과 | “레시피를 바꾸지 않는다”는 현장 신뢰 축적 | 일부 지역 질병 퇴치·유병률/합병증 감소 |
리스크 감수 | 단기 수익 포기 → 장기 브랜드 자본 축적 | 재무 부담 수용 → 사회적 신뢰·접근성 확장 |
남긴 유산 | 경영자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규칙 | 기업 혼자 못 하는 일을 묶는 연합 모델 |
오늘의 적용 | 품질·윤리를 규칙으로 설계 | ‘승인 뒤’ 도달 경로를 연합으로 설계 |
5. 두 개의 혁신, 한 방향
첫째. 좋은 약을 만드는 혁신과, 그 약이 사람에게 닿게 하는 혁신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유일한은 첫 능력을, 바겔로스는 두 번째 능력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방향은 하나였다. 약은 결국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
둘째. 유일한박사가 바꾼 것은 공장보다 규칙이었다.
포뮬러, 품질, 복지, 장학을 제도로 묶어 “정직”이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조직의 습관이 되게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신뢰가 남았다.
바겔로스가 설계한 것은 제품보다 연합이었다.
국제기구·정부·NGO와 공급망을 나눠 맡아 “혁신”과 “접근성”이 양자택일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래서 과학이 생활의 변화로 번역되었다.
세째 . 오늘의 제약·바이오가 바로 실행할 일:
- 품질과 윤리를 규칙으로 고정하라.
- 임상 승인 뒤, 환자에게 닿는 경로(유통·교육·추적)를 미리 설계하라.
- 혼자 못 하는 일은 파트너십으로 풀어라 — 책임·비용·데이터를 투명하게.
정직은 약의 출발을,
접근성은 약의 완성을 만든다.
두 능력을 한 회사 안에 함께 세운 곳이, 내일의 표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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