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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포샤르와 박정철 교수 - 치아치료의 개척자 치통은 인류가 가장 오래 겪어온 고통 중 하나입니다.하지만 이를 과학으로 다루고, 환자의 삶의 질을 회복시키는 길을 연 인물들이 있습니다.18세기 프랑스의 피에르 포샤르와21세기 한국의 박정철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 피에르 포사르의 실험실, 미신을 깨다. 1700년대 초,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한 여인이 치통으로 밤잠을 설치다 포샤르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충치가 벌레가 갉아먹어 생긴다고 믿었죠.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제 치아 속 벌레를 꺼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포샤르는 현미경으로 그녀의 썩은 치아 조각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벌레가 아닙니다. 우리가 먹.. 2025. 9. 4.
빌리 브란트와 요한 바오로 2세: 무릎 꿇은 총리와 무릎 세운 교황 분단과 화해, 자유와 인권을 상징한 두 인물의 일화로 읽는 냉전사의 교훈 한 사람의 진정성 있는 몸짓은 때로 조약보다 강하다. 1. 바르샤바의 무릎 꿇은 총리 1970년 12월, 눈 내리는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헌화를 마친 뒤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현장은 충격과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고, 전 세계 기자들이 숨을 죽였다. 브란트의 무릎 꿇음은 전후 독일의 회피를 멈추게 한 행동의 언어였다. 그는 젊은 시절 나치에 맞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과거의 죄를 국가 지도자의 위치에서 인정하고, 화해의 출발점을 마련하려 한 진정성의 표현이었다. 당시 서독과 동독은 냉전의 장벽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대.. 2025. 9. 3.
엄홍길대장과 에드먼드 힐러리 - 히말라야를 넘은 두 사람 산은 인간에게 언제나 도전과 신비였다. 누군가는 그 앞에서 무릎 꿇었고, 누군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정상을 딛고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국의 엄홍길대장,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두 산악인의 삶은 ‘정상’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그 발자취에는 도전과 나눔이 함께 담겨 있다.1. 정상에 선 순간 1953년, 힐러리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그는 원래 뉴질랜드 시골의 평범한 양봉업자였다. 그러나 끝내 세계사의 한 장면에 이름을 남겼다. 정상에 선 뒤 남긴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우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에베레스트가 우리를 허락한 것이다. 수십 년 뒤,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6좌를 모두 .. 2025. 9. 1.
금난새와 레너드 번스타인: 무대를 교실로 바꾼 지휘자들 서울의 체육관이나 도심 공원. 검은 턱시도의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넵니다.“오늘은 박수도 악보입니다. 이 리듬으로 시작해 볼까요?” 관객이 손뼉을 치자 오케스트라가 그 리듬을 이어받습니다. 금난새의 ‘토크 콘서트’ 풍경입니다. 그는 클래식 앞에서 먼저 말을 걸고, 웃음을 열고, 손뼉으로 문을 엽니다. 뉴욕 카네기홀의 텔레비전 카메라 앞. 레너드 번스타인은 아이들과 부모들로 가득한 객석을 보며 묻습니다.“음악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바이올린이 같은 멜로디를 여러 감정으로 연주하는 걸 들려줍니다.‘정답’ 대신 ‘느끼는 법’을 가르치던 Young People’s Concerts의 장면입니다. "무대가 곧 교실이 되는 순간이었죠." 1. 클래식의 문을 낮추다두 사람은 모두 설명하는 지휘자였습니.. 2025. 8. 31.
안향과 정재승 교수 : 시대를 넘어 지식을 전한 두 사람 성리학의 씨앗을 들여온 사신(安珦) 과학을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뇌과학자(정재승 교수)1. 고려의 한 사신, 책을 품다1290년대, 원나라로 향한 고려 사신단 사이에서 조용히 눈빛을 빛내던 인물이 있었다. 안향(1243‒1306). 그는 단지 외교문서에 도장을 찍는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이 시대를 움직일 새로운 생각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갈증이 들끓었다.원나라의 서고에서 처음 마주한 책, 주자(朱子)의 성리학. 책장을 넘길수록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꿰는 질서가 펼쳐졌다. 안향은 그 자리에서 결심한다. 이 책은 단순한 활자 묶음이 아니라, 나라의 길을 바꿀 씨앗이라고. “이 책을 들여오라. 오늘의 파문이 훗날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귀국길, 그는 책을 품에 꼭 안았다.불교가 지배적이던 .. 2025. 8. 30.
왕건과 송 태조: 무에서 문으로, 바다에서 관료제로 후삼국의 바람이 거칠던 10세기, 송악(개성)의 젊은 무장 왕건은 배를 띄워 물류를 움직이던 상인 집안의 감각으로 전장을 읽었다. 강가의 안개가 걷히면, 그는 항구와 곡창을 잇는 물길에 먼저 깃발을 꽂았다. 같은 세기, 중국 북부의 새벽. 조광윤(송 태조)은 출정을 앞두고 진교(陳橋)에서 군사들에게 황색 비단옷을 입혀져 추대된다. 이른바 진교의 변(960). 그는 즉위하고 북송을 세운다. 공통된 시작점: 분열의 끝을 매듭짓겠다는 결심. 왕건은 바다의 길로, 조광윤은 군의 길로 그 결심을 실행했다. 1. 권력을 잡는 방식: 해상 연합 vs 군권 장악왕건은 정면충돌만 하지 않았다. 혼인동맹과 상인 네트워크, 항구·수로 장악으로 먹고 싸우는 길(보급선)을 먼저 만들었다.공산 전투(927)의 패배 후에도 해.. 2025.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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